SURFACE : STORIES
Dec.11, 2024 - Jan.18, 2025
Photo by Park Sangyong
ARTIST
Vera Molnar , Jeong Eunju, Kim Yisu
Chen Lizhu, Takimoto Yumi
오프닝 특강
- 2024.12.13(금) 오후 5시
- 김복기 (아트매거진 '아트인컬쳐' 대표)
: 추상미술의 이해, 전시 설명 및 출품 작가 해설 등
어컴퍼니에서는 한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 4개국 5명의 여성 추상작가의 특별전 <SURFACE : STORIES>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국내 저명의 미술 전문 잡지인 ‘아트인컬쳐’의 김복기 대표의 기획으로 작품의 ‘표면’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 추상이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은 물론,국내외 5명의 여성작가가 담아내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특히 지난 12월 13일 전시 오프닝에는 '추상미술의 이해 및 전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김복기 대표의 특강이 진행되었다.
추상미술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형태를 그리지 않고, 색, 형태, 선, 질감 등 미술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사용하여 감정, 아이디어, 개념을 표현하는 미술 장르 중 하나이다. 즉, 현실 세계의 사물이나 풍경을 그리거나 실질적 형태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나, 색상과 형태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람자에게 작가의 사유나 감각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추상미술에서 ‘표면’은 예술적 언어이자 감정의 표현이다. 단순한 재료적 특성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철학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을 통해 추상미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시각의 저변을 넓히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베라몰나 Vera Molnar (1924-2023, worked in Paris)
헝가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 베라몰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 미술대학에서 회화, 미술사와 미학을 공부했으며, 1947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 파리에 머물며 작업을 해왔다.
베라몰나는 컴퓨터를 예술 도구로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디지털 프린터를 사용하여 기하학적 추상을 표현한 ‘컴퓨터 아트‘의 선구자이다.
1968년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을 접한 후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뒤러, 모네 등 미술사의 거장들 외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오마주해 왔다.
기하학적 형태가 반복되고, 선적인 성격이 강한 베라몰나의 작품은 수학적 질서와 변수 및 변형 요소 사이의 묘한 관계성을 절제된 언어로 보여준다. 알고리즘과 음악적 구성, 개인적인 이야기가 결합되며 차가움과 동시에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Interruption – Continuation
Serigraphy on paper_30x30cm ed.50_1961-1992
정은주 Jeong Eunju (1964-, works in Daegu)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은주는 색을 표면 가득 담아낸다. 작가에게 색은 선과 면을 구성하며 그 자체로 서사를 가지고 있다.
아크릴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들며, 캔버스와 물감을 수묵의 감각으로 다루며, 화면과 물감의 관계가 일체화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면과 물감의 일체화는 한국미의 정신과 연결되기도
한다.
색으로 켜켜이 쌓아 올려 중첩된 색면의 작품은 물감의 얼룩, 붓질, 색채의 겹, 중력에 의해 번지다 응고된 물감의 궤적을 보여준다.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징후들은 작품에서 나오는 여운과 내면적 울림에 더욱 몰입되도록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Untitled 242012_Acrylic on canvas_90.9x72.7cm_2024
김이수 Kim Yisu (1974-, works in Seoul)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이수는 앵프라맹스(inframince)의 개념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가이다.
‘앵프라맹스’는 마르셀 뒤샹이 제시한 개념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나 경계를 의미한다.
김이수는 이 개념을 활용하여 회화의 표면에 시각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를 표현한다.
일정한 방향의 붓질로 아주 얇은 면과 면을 수십 차례 겹쳐 미세한 그러데이션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극도로 얇고, 그 얇음이 극단에 도달한 상태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사태'나 '경계'가 사라진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각적인 경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감각의 세계를 제시하며, 인간 존재와 주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23083002 Infrmince-Encounter
Acrylic on canvas_100x100cm_2023
Meditation Space 2021027
Oil on canvas_100x50x3.5cm_2021
천리주 Chen Lizhu l 陈丽珠 (1979-, works in Shanghai)
천리주는 중국의 짧은 추상화 역사 속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로, 상해사범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한 후, 네덜란드 Hanzehogeschool Groninge 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하였다.
천리주는 색채와 질감, 공백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끊임없이 철학과 역사서를 읽으며 깨달은 것들에 그날그날 삶 속에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작품에 담는다.
단순히 즉흥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질서를 만들어내며 철저한 계획과 계산을 작업의 기반으로 한다. 캔버스의 전면은 균질한 색면처럼 보이지만, 크고 작은
붓 터치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여러 겹의 색을 덧칠하여 깊이감을 자아냄으로써 관람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캔버스의 테두리마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며 전통적인 회화
표현의 틀을 허무는 동시에, 평면에 입체적 조형성을 부여하여
표면의 경계를 확장하였다.
천리주의 <명상 공간>시리즈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사유이며, 색채와 질감, 공백을 통해 진실과 마주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공백은 ‘영혼’의 공간으로 간주하며, 명상을 통해 존재의 의미,
내면의 깊은 진리를 성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이러한 시각적, 정신적 경험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진솔한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을 제시한다.
타키모토 유미 Takimoto Yumi l 滝本 優美 (1992-, works in Tokyo)
일본의 신진 작가 타키모토 유미는 무사시노 예술대학 회화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색채와 형태, 촉감을
자유롭게 다루며, 조형을 구축하는 추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타키모토 유미의 작업은 특정한 형태나 색상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오직 물감이라는 물질만이 존재한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페인팅 나이프로 풍성하게 바르는 방식으로 표면의 독특한 질감과 틀을 벗어난 새로운 테두리를 만든다.
작가는 추상미술을 가사 없는 음악에 비유하며, 예술이 개인의 감정과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Expected color
Oil on canvas_45.5x45.5cm_2024
- 오프닝 특강 -
추상미술 다시 읽기
: 김복기 (아트매거진 '아트인컬쳐' 대표)
1. 본래 미술은 추상이다 ‘추상’은 일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대상물을 그리지 않는 작품을 가리킨다. 여기서, 추상의 사전적 의미 이상을 짚고 싶다. ‘추상’이란 말을 듣고서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본래 모든 미술은 추상적이다.(허버트 리드) 회화에 있어서 추상성의 문제란 미술표현의 기원에 상응된다. 본다는 일, 그린다는 일 자체가 이미 추상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이우환) 허버트 리드의 말을 풀이하면, 미술이란 본래 모두 추상적이며, 그 본질은 형태와 색이 조화를 이룬 배합에 있다는 사실이리라. 이우환의 지적은 더 심오하다. 회화란 아무리 구체적인 대상을 그린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상’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회화의 비밀은 본다는 일, 시각의 형이상학적 욕구에 상응하는 비대상성에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 ‘그리다(draw)’라는 단어는 ‘갈망하다(desire)’와 동의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회화를 무한히 상상을 불러일으키는‘가상(schein)’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많은 사람이 ‘추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작가 중에는 이 말이 불러오는 오해를 생각해 자기 방식을 고안했던 사람도 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칸딘스키는 ‘비구상’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고, 몬드리안은 자기 작품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구체’, ‘순수’, ‘구성된’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있다. 또 추상과 동의어로 ‘비대상(non-objective)’, ‘비재현(non-presentation)’, ‘비구상(non-figuration)’이라는 용어도 널리 사용된다. 이뿐인가. 차가운 추상/뜨거운 추상, 서정적 추상/기하학적 추상, 유기적 추상, 컬러 필드 페인팅, 옵아트, 하드에지, 세이프드 캔버스, 미니멀아트…. 추상미술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미술이 본래는 추상적이라 한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추상미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뭔가 특정 대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회화 중에는 우리가 봤던 어떤 사물을 의도적으로 암시하는 것도 있으며, 또한 이런저런 의도 없이도 어딘가 친숙한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있다. 보는 사람에게 그 무엇도 떠올리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동그라미를 보면, 누구라도 거기에 얼굴 모양을 겹쳐보고 싶다. 장방형을 단순히 둘로 나눈 수평선조차도 풍경처럼 보인다. 서구 추상미술이 탄생한 지 110년이 넘었다. 추상미술이란 서구 모더니즘의 소산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모더니즘의 급격한 퇴조에 이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확산으로, 이제 추상을 동시대 미술의 한 분파로 분류하기에는 그 개념이나 예술적 실천의 폭과 깊이가 너무나 다양해졌다. 구상/추상, 내용/형식, 지각/직관, 서사/상징, 표현/개념 등과 같은 이항 대립의 틀이 허물어졌다. 어떤 이론가는 “추상은 ‘양식’이 아니라 작가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작가마다 각각 다른 추상이 나온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한국적 모노크롬으로 불리던 일군의 추상회화가‘단색화(單色畵, Dansaekhwa)’라는 이름으로 국제무대에서 시민권을 획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국가가 이 짧은 기간에 독자의 추상미술 양식을 만들어냈다. 세계에서 사례가 없다. 단색화라는 명칭의 정합성을 떠나 미술사적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이론가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논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단색화 이전, 혹은 이후의 한국 추상은 무엇으로 부르는가. ‘포스트 단색화’는 가능한가. 여전히 비평계의 논제다. 2. 추상, 형식주의, ‘표면(Surface)’ 20세기 서구의 추상미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미술론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1970년대 말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린버그는 칸트의‘비판’철학을 자기식으로 도입했다. 여기서 말하는‘비판’은 독일어로 ‘kritik’. 크리틱은 그리스어 ‘크리네인’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크리네인’이 뭔가. 예를 들면 강바닥의 진흙을 자루로 건져 물로 여과하면, 점점 진흙이 떨어져서 나가고 사금 덩어리 같은 것만 남는다.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불순물을 가려내고, 가치 있는 것을 취하는 작업, 그것을 ‘크리네인’이라 한다. ‘크리틱’이란 나쁜 것/좋은 것, 아름다운 것/추한 것, 순수한 것/불순한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은 자기비판이다”라고 말한다. 회화라는 하나의 예술 장르가 있다. 조각도 아닌, 건축도 아닌 장르의 순수성을 파고든다. 그린버그는 회화를 투명하고 명증한 형식, 바로 순수한 ‘평면성(flatness)’의 조건으로 환원하려 했다. 그린버그는 이데올로기나 서술성 같은 내용은 일절 말하지 않는다. 작품의 형식을 전면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포멀리즘 비평을 신봉한다. 포멀리즘은 매체(medium)을 문제로 삼는다. 그린버그가 말하는 매체는 회화의 경우 지지체, 물감, 캔버스, 액자 같은 물질적인 여러 조건이다. 그린버그는 말한다. “모더니즘은 매체에 우리의 의식을 돌리는 것이다.” 그는 회화로서의 방식, 회화라는 존재를 지탱하는 물질적인 여러 조건을 문제로 삼는다. ‘매체 고유성(medium specificity)’을 존중한다. 포멀리즘은 어떤 의미에서 ‘머티리얼리즘(materialism)’이다. 결국, 그린버그에게 자기비판은 자기 언급성, 순수성의 추구와 동의어라고 해도 좋다. 추상미술에서 ‘매체 고유성’을 실천하는 다양한 작품이 나왔다. 지금도 이 변용은 지속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에 상응하는 추상은 한국미술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하학적 추상, 혹은 1970년대의 한국 모노크롬(오늘날 ‘단색화’라 부르는)에 와서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각 작가의‘매체 고유성’의 자기 고유성은 과연 무엇인가. 작가들은 어떤 방법과 정신으로 평면 조건을 독자적으로 창안하는가. 이 평면 조건의 압축하는 키워드가 화면의 ‘표면(surface)’이다. 표면은 작품의 살갗, 피부다. 저 사각 화면의 물리적 조건, 회화의 피부에 대한 새로운 감각, 추상 화가들은 이 표면이라는 매체 고유성을 어떻게 자기화하고 있는가. 표면의 연금술! 천리주의 화면은 단순한 색면처럼 보이지만, 모든 작품은 색채로 쓰는 시(詩). 때로는 색채는 따스하게, 때로는 냉담하게, 때로는 당당하게 다가온다. 전면 균질(all-over)한 표면이지만, 크고 작은 붓 터치로 미묘한 차이의 뉘앙스를 드러낸다. 표면의 연금술은 중국 전통 서사(書寫)의 전통을 잇는다. 물감을 화면 전체에 먼저 바르고, 다시 붓끝으로 써내는 ‘직접 화법’을 구사하는가 하면, 팔레트에 물감을 개어 넓적한 면으로 평평하게 써내는 ‘간접 화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층층이 겹쳐진 색채의 삼투압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테두리 선은 회화와 조각 사이의 유랑이며, 제한인 동시에 서광이다. 미완의 상태이자 상상의 보충 공간이다. 정은주의 회화 표면은, 박영택이 지적했듯이, 물감의 얼룩, 붓질, 색채의 겹, 미묘한 공간과 틈새, 중력에 의해 번지다 응고된 물감의 궤적을 보여 준다. 화면은 아크릴 물감의 습성에 의해 캔버스 천이 마치 화선지처럼 적셔진 느낌, 선염의 느낌을 받는다. 아크릴릭 물감을 수묵의 감각으로 다룬다. 따라서 붓질의 완급, 일회성의 행위, 재료 자체의 우연성 등의 특성이 표면의 특성을 이룬다. 지지체와 표면의 관계가 보다 더 일체화되어 있다. 작가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화면과 물감이 만나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어떤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인의적이지 않고 재료 스스로 형성된 상태와 자신의 신체,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존재를 아예 재료 자체와 일체화하거나 흡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이수의 지향하는 표면은 앵프라맹스(inframince)다. 일정한 방향의 붓질로 면과 면을 수십 차례 겹치면, 화면은 미묘한 그러데이션이 일어난다. 가까이서 보면 선이 겹겹이 쌓인 것이다. 미세한 차이의 감각이다. 이 감각을 뒤샹은 앵프라맹스라 불렀다.(앵프라맹스는 ‘아주 얇다(ultrathin)’, ‘아주 작다(ultratiny)’라는 의미다.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두께, 구분, 간격 등에 적용된다.) 시각적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이다. 얇음 이상의 얇음, 너무 얇아서 이미 얇음의 범주 바깥을 나가고만 ‘사태’, 얇다는 지각조차 잃어버린 극한의 얇음을 뜻한다. 더 이상 경계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사태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타키모토 유미는 5명의 작가 중 가장 ‘플러스 조형’에 치중한다. 집적 혹은 구축의 조형이라 해도 좋다. 그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나이프를 잡습니다, 표면에 물감을 넉넉히 바릅니다. 피부에 크림을 바르듯이. / 그림의 무게를 느껴보세요, 캔버스의 탄력이 제 손에 기쁨을 선사합니다, 캔버스 틀을 뛰어넘어 캔버스 틀을 벗어납니다. 산화하여 새로운 가장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정의된 자국을 잃게 됩니다. / 마치 건물과 콘크리트 조각처럼, 스스로 서 있는 것처럼 세워집니다.”그녀의 표면은 미장이들의 손놀림처럼 거침이 없다. 색채, 형태, 촉각을 가지고 즐겁게 놀고 있는 것 같다. 베라 몰라(1924-2023)는 이전 전시 작가 중에서 표면의 표현이 가장 얇고 단순하다. 디지털 프린트의 출력이 작품의 최종 결과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아트의 선구자다. 그녀의 기하학적 추상화는 엄격한 구성 방법으로 제작된다. 그 구성은 1968년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Fortran)으로 기계에 무한한 알고리즘 변형을 입력할 수 있었다. 0과 1의 언어를 사용하여, 컴퓨터에 명령어를 입력한 다음, 플로토 프린터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펜으로 선 그림을 그려 출력할 수 있었다. 또 체계적으로 결정된 작업에 영향을 균열을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1% 장애'를 도입하기도 했다. 작가는 “내 삶은 사각형, 삼각형, 선”이라고 말했다. 3. 추상, 내용주의, ‘이야기(Story)’ 오늘날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무엇보다 복합문화주의의 대두 이후, 지구촌의 미술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그동안 ‘유일신’처럼 군림했던 서양 미술의 전통이 큰 힘을 잃었다. ‘서구=중심, 비서구=주변’의 위계가 무너지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무수한 전통과 무수한 이의 제기가 넘쳐나고 있다. 추상미술도 그저 국제공통어라고만 판단해야 할 일이 아니다. 동양의 추상이 다르고, 아시아의 추상이 다르다. 한국의 추상도 있다. 복수의 모더니즘, 복수의 추상 미술사가 가능하다. 서로 다른 지역, 국가, 세대의 여성 작가 5인의 표면 이야기. 그 예술의 궁극의 지표는 무엇인가. 천리주의 시리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숲이다. 색채의 공백, 질감의 공백, 소리의 공백. 작가는 말한다. “공백과 마주하면 진실과 마주한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과 마주할 때 절대에 귀를 기울인다.” 결국, 그 공백은 무형의 ‘영혼 공간’이다. 그에게 명상이란 영혼의 거울이자 생명의 궁극적인 각성이다. 중국 철학자 펑요우란은 말했다. “진정한 형이상학은 반드시 공령(空靈)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정은주의 그림은, 박영택의 지적대로, 가시성 바깥에 자리지만 분명 느껴지고 감각되는 어떤(it) 미지에 대한 표현에의 갈망으로 이루어진 회화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모든 풍경의 징후들, 그러니까 얼굴 없는 세계의 회화화로도 보인다. 그의 표면에는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공감을 유발하는 인상과 색조, 울림이 번진다. 모종의 떨림이 이 그림에는 존재한다. 그 떨림의 진폭이 넓은 여운을 거느린다. 이른바 내면적 울림이다. 김이수는 앵프라맹스의 감각을 통해 현실이면서도 현실 너머에 있어 마치 가상(virtual)과 같은, 현실 속의 잠재적 가능성의 시간과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음악에서라면 배음(倍音, over tone)에 해당된다. 결국, 앵프라맹스는 ‘사이(in-between)’의 미학이다. 인간의 내면과 세계 사이의 거리, 그 사이에 혼재하는 경험과 상상, 가시 세계와 비가시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타키모토 유미 작품은 어떤 형태나 색상을 연상시키는, 뭔가처럼 보일 수 있다. 바로 거기에 그림의 실체가 존재한다. 작품 제목은 작가가 느끼고 보는 색채과 형태의 이름이다. 우리는 어떻게 보고 느끼면 좋을까. 작가는 말한다. “좋을 대로 받아들이고, 좋을 대로 부르세요.” 추상은 가사없는 음악, 교향곡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사로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베라 몰라의 작품은 앞의 동양 작가와 달리 선적(linear) 성격인 강한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이다. 그럼에도 의외로 그의 작품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알고리즘의 선구적 뮤지션에 대한 오마주와 음악적 구성, 뒤러에서 시작해 모네, 추상미술의 말레비치, 클레 등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을 인용(appropriation)한 프로그래밍, 어머니의 편지를 모티프로 삼은 사적인 이야기 등 실로 다양하다. 개인과 세계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졌다. 비평은 작가를 주어로 쓰는 작품 분석, 그 분석으로 저마다의 피와 살을 재구축해야 할 터이다. 작가마다 더 적합한 형용사가 붙는 추상미술 말이다. 표면의 다채로운 이야기!
Exhibition view
Photo by Park Sangyong